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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의 세계

2018 (01) 본문

2018

2018 (01)

에마마 2018. 3. 3. 07:33

세상의 빛은 전부 사라졌다. 세상은 회색 도시이다.


* 마우스 오른쪽 버튼, 연속재생


EP. 01



창문 밖으로는 거센 바람이 불고 있는지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귀를 찌르고, 하늘에서는 비가 올 것인지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하늘뿐만이 아니었다. 이 세계는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늘 날려 들어오는 먼지와 잿더미들로 이미 집도 충분히 회색의 먼지로 쓰여있었고, 당연히 환기를 시킬 깨끗한 공기는 이 세상에 없었다. 우리를 밝혀줄 빛이 없었다. 잿빛으로 물든 이 세계에는 아무런 색도 존재하지 않게 됐다.

" 형.. "

잠에서 깨어난 아카아시는 자신의 옆에 누워있어야 할 보쿠토가 보이지 않자 눈을 비비며 일어나 으슬으슬한 저의 몸에 두꺼운 카디건을 걸치고 거실로 나가 커튼을 살짝 들추며 창문 밖의 세상을 멍하니 보고 있는 보쿠토의 옷자락을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 아, 케이지- 일어났어? 조금 더 자지. 왜 "


" 어제 일찍 잤잖아.. 눈이 떠졌어. "


그대로 아카아시의 손을 잡아 먼지투성이인 소파 위를 저의 옷깃으로 대충 닦은 뒤 앉히고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냉장고에 물을 집어 들어 입을 헹구라며 건네주었다.

" 고마워. 형아 "


빛 한줄기 없는 세상에서 시간을 제대로 가늠하기란 쉽지 않았다. 집 안에 있던 시계들조차 약이 떨어져 초침은 멈추어있었고, 전기와 수도는 나오지 않아 씻을 수도 전자기기를 충전할 수도조차 없었다. 그만큼 시간은 꽤 흘렀었고, 그들의 나름대로 시간을 보내며 삶을 지켜내 가고 있다.

3개 있던 보조 베터리 조차 더 쓸 수 없게 됐고, 노트북도 이제 전원조차 켜지지 않았다. 그 시간은 고작 3일이었지만 그간 저의 옆에서 나름 도움이 되었던 핸드폰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자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인터넷이 되지 않아도 SNS를 통해 바깥의 상태를 확인 할 수 있었고, 주변의 편의점을 확인해 식품을 가져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편의점의 물건들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더 이상 휴대폰으로 확인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 밖의 나갈 수 있는 생각은 쉽사리 하지 못했다. 함부로 나갔다가 다시는 집에 들어오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고, 근처의 편의점에는 더는 쓸 수 있는 물건도 없을뿐더러 다른 곳을 간다고 하더라도 그곳에는 있으리라는 보장도 할 수 없었다. 아파트 단지 내에 생존자도 꽤 있던 것이었는지 그들이 처음 편의점에 갔을 때도 꽤 많은 생필품은 없던 상태였다.

더군다나 아직 10살 11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함부로 밖에 나갔다가는 생존자들의 눈 밖에 나 더 위험해 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지금껏 구해온 물과 비상식량은 앞으로 일주일도 못 버틸 만큼의 양뿐이었고, 아무것도 못 하는 아이들은 그저 저들이 존재하는 집 안, 큰 창문으로 바깥의 상황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 이제 식량도 얼마 남지 않았어.. 지금까지처럼 조금씩 나눠 먹을 수 있지. 케이지? "

" 응.. "

그들은 어렸지만, 생각과 행동만큼은 어른들 못지않게 침착하고, 조심스러웠다. 세상에 빛이 사라지고 어둠만이 생겼을 무렵의 날부터 보쿠토는 저와 아카아시가 살아갈 길만 생각해왔고, 아카아시도 그런 보쿠토를 따르고 도와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

" 형 것도 먹어. 형은 그렇게 배고프지 않아 "

보쿠토는 저의 접시의 놓인 통조림 참치를 아카아시에게 덜어주며 얼마 남지 않은 페트병의 물을 따라 천천히 먹고. 라며 그의 앞으로 물컵을 내민다.

" 그치만.., 형이 배고파서 먹으면 안 된다고.. 난 괜찮아. 형아 먹어 "

그 작은 손으로 아카아시의 푸석한 머리를 쓰다듬고는 '괜찮아'하고, 현관에 있던 빗자루로 아직 쌓여있는 잿 덩이와 먼지들을 청소한다.
환기를 시킬 곳도, 이 먼지들을 버릴 곳도 없다. 조금이라도 창문과 현관문을 열면 순식간에 집안은 더러워졌고, 쾌쾌한 냄새와 먼지들은 코와 입으로 훅 들어와 한동안 기침을 해야 했고, 그의 물 낭비는 더 심하게 됐다. 이미 많은 이물질들이 몸속으로 들어와 이젠 조금만 먼지를 들이마시면 기침을 할 땐 심장까지 아파졌고, 심하면 코피도 한참 흘렸다. 3일 전까지 바깥을 돌아다니며 겪어왔던 상황들이었다.


한참을 청소해도 집안의 먼지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보쿠토는 청소를 매일같이 해왔다. 몸이 약한 어린 케이지를 위해서 청소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빗자루로 바닥을 쓸고, 테이블을 닦는다고 한들 집안의 쌓여버린 먼지는 계속 존재할 터인데, 보쿠토는 청소를 매일같이 해왔다.

" 형아.. "


아카아시의 부름의 보쿠토는 닦고 있던 손걸레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아카아시가 있는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응. 케이지. .. 케이지?!!! 그가 갔을 때는 이미 통조림 참치와 접시, 탁자 위로 피가 흥건했고, 아카아시는 저의 입을 막고 힘없는 목소리로 보쿠토를 계속해서 부를 뿐이었다.

" 케이지..!! 케이지!!! 왜 그래...!! "


연신 기침을 해대며 한 손으로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저의 입을 막고는, 다른 한 손으로는 도와달라는 손길로 보쿠토에게 힘겹게 뻗고 있다. 아직 그들은 어렸고 이런 상황에서 통신도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주변에는 어린 그들을 도와줄 이웃도, 다른 어른들도 없었다. 보쿠토는 냉장고에 남아있는 아직 뜯지 않은 페트병의 물과 바지 뒷주머니에 항상 넣고 다녔던 손수건을 꺼내 충분히 적시고 아카아시의 코와 입을 살짝 눌러 막아주었다.

케이지. 조금만 참아-, 내가 나가서 어른들을 불러올게. 보쿠토는 피로 범벅이 된 아카아시의 손을 닦아주며 침착하고, 빠르게 행동을 했다. 두피에서부터 흐르는 식은땀을 저의 더러워진 손등으로 대충 닦고 아카아시를 부축해 저들이 늘 자는 침실에 눕혀주었다.

" 가지 마.. 형아... 나 괜찮아- "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적부터 케이지는 늘 병원을 오고 가며 일 년의 두어 번은 입원까지 했었다. 서로가 알고 지내며 그런 아카아시를 봐온 보쿠토는 저보다 작고, 한없이 약한 케이지를 자신이 돌봐주어야겠다는 알 수 없는 사명감을 갖고 매일 집에서만 있어야 하는 아카아시를 위해 좋아하는 야외 활동을 포기하고는 아카아시의 집으로 왔다. 처음에는 괜찮다며 보쿠토를 거부하는 아카아시였지만 시간이 지나며 보쿠토가 안 보이는 날에는 직접 자신이 보쿠토의 집으로 갈 정도였다. 그만큼 둘의 사이는 깊고, 애틋했다.

가지 말라며 그 작고 떨리는 두 손으로 보쿠토의 손을 잡아왔다.
그치만 케이지, 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내가 금방 나가서..

나가서?

나간다고 달라질게 있어? 사건이 터지고 난 후 길거리에서 우리를 본 어른들은 다 피하고, 무시하고, 폭행을 했었어. 한 번은 우리를 납치까지 하려고 했다고. 나가서 어른들을 찾으면 뭐? 우리를 도와줄 것 같아?

저의 머리를 짧게 스쳐간 생각들이었다. 그래. 나간다고 한들 사람이 있을 확률도, 우리를 도와줄 누군가가 있다는 확신도 없어. 괜히 나갔다가 내가 위험에 처하면 아카아시는 계속 혼자 일 거야. 보쿠토는 지금 자신이 뭘 해야 아카아시를 도와줄 수 있을지 생각을 했다. 이미 아카아시가 복용하는 약이 떨어진지는 오래였고, 아카아시의 상태를 저는 알 수없으니 정말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럼.. 네가 이렇게 아파하는데 나는 그냥 지켜보기만 해야돼?


곧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저의 아랫입술을 꽉 깨무는 보쿠토다. 그런 보쿠토의 손을 잡으며 자신은 괜찮다고 예쁘게 웃어 보였다. 바싹 말라버린 입술에서는 약간의 피가 고였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몸 상태도 그리 좋지 못한 아카아시는 전보다 훨씬 더 야위어가고 있었다. 저의 오른손 위로 포개어진 작고 마른 아카아시의 손등 위로는 어느덧 제 눈물이 뚝뚝 흘러 두 손에는 물기가 가득이었다.

아카아시. 어떡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돼? 너마저 잃고 싶지 않아.


처음 사건이 발생한 건 아마도 일주일 하고 2일 전이었다. 그날의 주말에도 여김 없이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떠올리며 아침 일찍 일어나 '오늘은 케이지에게 배구를 알려줄 거야' 라며 분주히 짐을 챙겨 집을 나왔다. 그의 부모도 아카아시를 걱정하며 너무 과하게 하지 말라고, 아카아시가 좋아하는 주먹밥을 챙겨주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은 그의 얼굴을 날카롭게 스쳐 지나갔다. 코와 귀는 이미 붉게 변했고 감각도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15분을 뛰어 아카아시의 집으로 들어왔을 땐, 그의 부모는 이미 일을 하러 나간 후였고, 익숙한 듯 아카아시는 혼자 밥을 차려 먹고 있었다.

' 아!! 아카아시! 내가 온다고 연락을 못했다.. 너랑 먹으라고 엄마가 주먹밥까지 싸주셨는데 '

저의 몸집보다는 조금 큰 백팩을 내려놓으며 배구공과 도시락통을 꺼내 보이자 아카아시의 얼굴에는 금방 화색이 돌았다. 아니, 보쿠토가 저의 집 비밀번호 키를 누르고 얼굴을 내비친 순간 우울했던 그의 마음은 이미 오래전에 풀렸을 것이다.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조금 높은 의자 위를 뛰어 내려와 입에 있던 반찬을 우물우물 씹어 삼키고는 보쿠토의 두 손을 잡아왔다.

' 케이지..? '

' 나랑 배구하기로 한 거.. 오늘 하는 거야? 응? 코타로 형!! '

아마 병원을 퇴원해 가고 싶었다던 놀이공원을 처음 갔을 때의 그 표정이었다. 정말 얼마 만에 이렇게 환하게 웃어 보였는지. 괜히 저의 마음이 간질거렸다. '그래도 먹던 밥은 마저 먹어. 소화 좀 시키고 나가자, 주먹밥은 그 후에….' 말을 채 다 끝내기도 전에 갑작스레 흔들리는 땅과,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음의 그들의 귀는 찢어지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땅의 진동은 지진이 아니었다. 큰 탱크 여러 대가 지나가는 소리와 하늘에서는 몇 대의 헬리콥터가 아파트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 형아..!! '
' 케이지!! '


" 케이지!!! "


" 코타로 형..!? "

형아.. 무서운 꿈꿨어? 땀 엄청 많이 흘러..

밖에 있던 아카아시는 그의 외침에 부리나케 방으로 들어와 보쿠토의 상태를 살피며 걱정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옷깃으로 보쿠토의 이마부터 턱 끝까지 흐르는 땀을 닦아주며 걱정스레 그를 바라보는 아카아시다. 언제 잠들었는지 아카아시는 그의 옆에 앉아 누워있는 보쿠토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고, 다행히 기침은 멈췄는지 아까와는 다르게 안색이 조금은 좋아진 듯 보였다.


" 케이지.. 너 이제 괜찮아? "

" 응. 저 아저씨가 도와줬어.. "


아저씨..?

" 꼬맹아- 아저씨가 아니라 형이라고. 일어났네? "




2018. 12월의 어느날.